14번째, 세이리스의 이야기
이웃집 활동가는 홀수달 마지막 주에 한 번씩 찾아와 다시함께상담센터 활동가의 삶과 활동 이야기,
활동 중 겪은 인상적인 경험, 그리고 활동가들은 일상 속에서 어떤 고민을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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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님
이번 이웃집활동가에서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여성폭력 분야의 길을 걷게된 활동가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기존의 신념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가치관을 쌓아 올리게 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시기를 바라며, 9월 이웃집활동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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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활동가가 되기 전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뭔가 특이하다고 할 만한 점은 왕복 2시간 40분의 출퇴근길, 최애 아이돌(이하 최애)의 케이팝을 감상한다는 점과 그의 공연이라면 국가에 상관없이 직관(직접 관람)하러 가는 점이었습니다. 최애의 일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저는 트위터를 통해 소속사와 팬 계정을 팔로잉 했습니다. 팬 계정 중 일부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리트윗을 통해 공론화 등에 적극적인 힘을 실어주시는 분들이셨습니다. 최애가 일본투어를 마친 2019년 가을 무렵, 수 십개의 팬 계정이 “n번방에 관심을 가져주세요”라는 내용으로 리트윗을 했고 저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기사를 비교적 초기에 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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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혐오 사회적 타살 멈춰라”…1년 만에 다시 열린 혜화역 시위, 한겨레,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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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한 순간 범죄의 잔혹성에 얼어붙은 저는 빠르게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니야.’라는 부정과 함께 수천명에 가까운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신원을 특정하여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표적삼아 괴롭힌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 두려움과 무력감을 주었습니다. 불안이 가라앉지 않은 저는 관련 리트윗을 하는 계정들을 언팔로우하여 기사로부터 멀어지는 방식으로 저를 보호했습니다. 활동가가 된 이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 무력감과 불안은 간접 외상이라는 증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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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2020년 2월 초, 밴쿠버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무려 5일의 연차를 신청하고 간 최애의 북미투어 콘서트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습니다. 비행기 바퀴가 지상에 닿는 충격을 고스란히 느낀 채로 에어플레인 모드를 해제하던 순간, 멈추지 않던 알람 진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가해자 검거 및 수사 관련 기사의 리트윗 알람들이었습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당시 느낀 충격이 지금도 착륙시 충격의 영향인지, 끊이지 않고 울리던 알람 진동 때문인지, 무력감과 불안을 피하고자 도망갔던 나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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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한국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고, 마스크 착용 및 식사 시간 조정부터 시작된 거리두기 방식이 재택근무 권고로 전환되던 시기였었습니다. 업무가 끝난 후 가상 업무 시스템을 종료하고 나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후속 기사를 보곤 했습니다. 방 안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무력감에 대해 생각하던 저는 ‘폭력에서 대해 조금이나마 알면 최소한 불안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폭력에 대해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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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과 병행하며 수강한 2021년 가정폭력상담원 및 성폭력상담원 양성과정을 시작으로 여성폭력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접하게 됩니다. 타고난 성별로 인해 일어나는 차별과 폭력을 교육 과정에서 알게 된 후 보이게 된 세상은 제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5단계 과정이 있습니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입니다. '적응하면 살만한 세상'이라는 신념을 떠나보내는 일은 수많은 감정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후에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여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으로 이끌었습니다. 회원활동팀의 엄청난 동기부여의 여파로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지?‘ 라고 생각했던 저는 우연치 않게 이전 회사 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성매매피해자생활지원시설 입사를 시작으로 하여 현재는 다시함께상담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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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원 경험을 통해 체득한 한 가지 사실은 정상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별, 인종, 나이, 가족구성, 인지능력, 장애여부, 성적취향, 재산, 학력 등 수많은 기준 속에서 하나라도 사회적 정상성 기준과 부합하지 않는 순간 그것을 빌미로 가해지는 무수한 폭력들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피해 지원이 그 계기였습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처한 상황 그리고, 맥락을 보려고 하는 것은 쉽게 택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축적한 삶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감정 소모도 많이 되고, 자원도 많이 투입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어려운 길로 가기 싫고, 쉬운 길로 가고 싶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차적으로 쌓여진 차별과 폭력을 해체하고 싶어하고, 피해에 연대하는 마음을 기르고 싶어 하는 동료 활동가들을 보며 반성하고는 정말 말 그대로 울면서도 어려운 기준으로 일하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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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저는 다시함께상담센터의 상담팀에서 현장지원팀으로 부서 이동하여 근무 중입니다. 저의 최애는 여전히 투어 콘서트를 하고 있고, 저도 한달 전 발매된 앨범을 들으며 영등포로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집결지기록화사업 담당자로서 영등포집결지에 존재했던 언니들, 그리고 여전히 그 공간에서 생활하고 살아가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영등포에 너무나도 분명히 오랫동안 존재해 왔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화시키는 집결지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건 과거 시점의 데자뷔 같습니다. 꼭 돌고 돌아서 왠지 꿈을 꾼 것만 같이. 그러나 과거의 제가 가졌던 무력감과 불안을 없애기 위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것같이 폭력 이후에도 내담자의 일상은 계속됩니다. 어디론가 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병원에 가고, 집으로 오는 내담자의 일상과 내일을 위해 누군가는 영등포로 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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